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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하는 딸에게(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1-31 오후 1:03:49

조회수 1790

게시물 내용
제목 사랑하는 딸에게(손병걸)
작성자 점자새소식 작성일 2019-01-31 오후 1:03:49 (조회 : 1790)
사랑하는 딸에게
손병걸(시인)
 
 아빠가 시력을 잃어갈 때 너는 네 살 무렵이었다. 그 어린 아기가 벌써, 스무 세 살이 되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사실 아빠가 강연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죠?” 그때마다 아빠는 이렇게 대답한다. 기적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랑하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네 살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그 모습이 몹시 보고 싶다고 대답한다.
  말이 나와서인데 너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파진다. 도무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파하지 마라. 요즘 아빠는 훌쩍 큰 네 키 때문에 놀라곤 한다. 어찌어찌 너는 잘 자라주었다. 숙녀가 되었다. 고마운 만큼 아빠는 늘 미안함이 많다. 그 많은 미안함 중에서 네가 크면 꼭 사과해야 한다고 다짐한 일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아빠와 엄마의 이혼이다. 어린 나이에 충격이 컸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성장기 내내 큰 탈 없이 지내주었다. 그러니까 네가 제법 말을 또렷이 할 무렵이었다. 아빠는 ‘베체트’라는 병으로 갑자기, 두 눈을 잃었다. 하루아침에 직장도 잃었다. 치료비 때문에 살림살이도 힘들어졌다. 엄마는 아빠 대신 일을 해야 했다. 아빠로서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회는 시각장애인에게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했다. 아빠는 그런 사회가 매우 원망스러웠다. 그때쯤 합병증으로 다시 시작된 투병이 고통스러웠다. 아빠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엄마랑 자주 싸웠다. 이러다가는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가정이 총체적으로 불안했다. 아빠와 엄마는 말을 잃어갔다. 차분히 대화를 시작해도 점점 거칠어졌다.
  결국, 아빠와 엄마는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너는 어떤 의사도 표현할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너는 어른들이 만든 결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늘 네게 미안하다. 엄마도 그럴 것이다. 너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이해해달라는 말은 아니다. 변명도 아니다. 그저 솔직한 고백이다. 모든 사랑은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패한 사랑도 있다. 실패한 사랑이라고 사랑했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추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때는 그랬다. 우리 사랑이 이렇게 가벼웠던가. 애초에 거짓이었던가.
  아빠는 한동안 엄마를 원망했다. 아니, 증오했다. 그러나 증오는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 입장에서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두 눈을 잃고 직장에서 쫓겨나 집에 갇혀버렸는데. 얼마나 암담했을까? 긴 투병 때문에 매일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찌 보면, 아빠도 엄마도 상처가 많고 너도 상처가 많을 것이다. 아빠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과거를 지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빠는 네가 씩씩하게 일어서기를 바랄 뿐이다. 어차피 사람은 각각 살아갈 길이 따로 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각자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아이야, 너는 그 소중한 삶을 즐겁게 살아냈으면 한다. 그 시절, 아빠는 슬기롭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네가 지혜롭기를 늘 기도한다. 언제였던가. 너는 아빠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빠는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대답을 이렇게 해주고 싶다. 네가 기타를 연주하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행복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풀어 오를 때 행복이다.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과 사랑이 만나 사랑이 넘치는 것이 행복이다. 벗들과 아름다운 인연을 만드는 네 모습이 행복이다.
  아빠는 네가 그린 그림처럼 너의 삶이 총천연색이길 바란다. 다양한 사람들과 호흡하는 생활 속에서 너의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가 곱게 번지기 바란다. 아빠가 눈을 잃고 얻은 것이 있다. 너의 모든 움직임이 자연의 소리로 읽힌다. 붓질 소리가 새싹이 돋는 모습으로 읽힌다. 스케치북 넘기는 소리가 베란다 창을 흔드는 바람으로 읽힌다. 물감 냄새 훅 끼쳐올 때면, 높은 산, 깊은 바다가 읽힌다. 이것이 아빠가 만난 행복이다. 이제 상처도 사랑하자. 실패도 기꺼이 사랑하자. 숨 쉬며 만나는 모든 것을 너끈히 사랑하자. 아직도 남아 있는 삶을 철저히 사랑하자.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내 사랑하는 아이야.
(2019. 2. 1. 제10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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