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정철우(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천지간에 봄이다. 가을은 북으로부터 오지만 봄은 남으로부터 온다. 천산을 넘고 만수를 건너 봄이 오는 것이다. ‘봄’하면 어린 시절 내 고향의 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입춘부터 봄이라고 말하지만, 인심이 후하고 순박한 내 고향사람들은 진달래가 피어야 봄이라고 생각했다. 연분홍 치마에 노랑저고리, 빨강 댕기를 한 소녀가 진달래를 한아름 안고 산길을 내려오면, 나비도 연분홍 치마의 소녀가 좋아 나풀나풀 소녀를 따라온다. 내 고향 우물가에 개나리가 피면 물동이로 물을 긷던 아가씨들은 개나리처녀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그 누구도 정복하지 않은 세상, ‘처녀’라는 말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처녀림’. ‘처녀지’, ‘숫처녀’ 아니 ‘숫총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봄이 오면 처녀들의 가슴만 설레는 게 아니고 총각들도 노래했다. ‘건넛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 가 주’라고. 강남 간 제비가 초가지붕에, 마당 빨랫줄에 모여들고, 어디어디어차 어디어디어 소 몰아 밭 가는 농부의 목소리가 산촌에 울려 퍼지면 고향의 봄은 무르익는다. 봄이 오면 고향의 아가씨들은 대바구니, 싸리바구니, 갈다리바구니를 옆에 끼고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나간다. 지평선에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퍼 담고, 보리밭 하늘 위의 종달새 울음소리도 모아 담는다. 나물만 캐는 것이 아니라 봄을 몽땅 캐어 담는다.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쑥쑥 자라는 쑥이 있다. 쑥을 뜯어다가 가마솥에 물을 붓고 삶아서 질자배기에 넣고, 물을 부어 쑥의 독을 몇 번 우려 낸 후, 손으로 쑥을 꼭꼭 짜서 쌀가루를 버무려 시루에 찌면 쑥버무리이고, 이것을 절구에 놓고 찧어 적당한 모양으로 만들면 쑥떡이다. 배고프던 시절, 쑥떡은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식품이었다. 그 시절 고향의 아가씨들이 캐던 나물이름을 열거하면, 달래, 냉이, 꽃다지, 국수댕이, 돌나물, 씀바귀나물, 미나리아제비, 질경이나물, 소리쟁이, 명아주나물, 고사리, 오야리, 고비, 새고비, 멱취, 곰취, 참취, 개암취, 뚝갈나물, 쇠시랑나물, 소전나물, 젓갈나물, 개발나물, 밀나물, 삽추싹 등이 있다. 한방에서 말하는 창출의 잎이 삽추싹이다. 공해가 심하지 않던 그 시절, 금방 뜯은 삽추싹에 밥과 고추장을 올려 쌈을 싸 먹으면 그 맛과 향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요즘은 도라지를 밭에서 캐지만 그 시절에는 산에서 캤다. 진짜 산도라지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스리살살 다 넘누나. 도라지, 인삼, 더덕은 본래 산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중국 진나라 진시황도 우리나라의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에서 ‘뫼 산’자 ‘산삼’이 아니라 ‘석 삼’자 ‘삼삼(도라지, 인삼, 더덕)’을 구해갔다는 기록이 있다.
나물을 캐다가 힘이 들면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호드기(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고향의 처녀들은 음악학교도 졸업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전수받은 적이 없지만 호드기로 불지 못하는 노래가 없었다. 음력 4월 초순경 산마다 송화가 피면, 온 산천이 노랗게 변한다. 송홧가루 날리는 산언덕에서 소나무가지를 잘라 겉껍질은 벗겨버리고 속껍질만 먹었다. 바로 ‘송기’다. 달짝지근하고, 씁쓰름하고 떨떠름했지만 배가 고파서 먹었다.
풀밭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자운영 풀꽃으로 풀꽃반지를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었다. 공들여 만든 풀꽃반지를 선물할 사람이 없어 섭섭할 때, ‘계집 죽고 구구구구 헌 누더기 이는 물고 구구구구’ 산비둘기가 구슬피 울면 괜스레 서러워서 꽃반지 처녀도 함께 울었다. 구슬픈 호드기 소리 그치고 청아한 보리피리 소리가 산촌에 울려 퍼지면 내 고향의 봄은 가고 이제부터 여름이다.
가난했던 내 고향, 천대받던 내 고향, 차령산맥이 지나가는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 은석마을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80년도 못살고 빈손으로 가는 인생, 뭐 그리 바쁜지 더러더러 고향에 가면 나물 캐던 처녀도 송화 따던 아낙네도 만날 길이 없어서 무심히 흐르는 세월만 원망한다.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터널이 뚫리고 산허리가 잘리고 양옥이 들어서서 복사꽃 살구꽃 피던 마을 어귀도 물레방아 돌아가던 물방아 거리도 찾을 길이 없다. 그래도 오십 수년 전 고향의 봄이 그리울 때면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낭송한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