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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마피리(조재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16 오전 11:16:44

조회수 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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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마피리(조재훈)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16 오전 11:16:44 (조회 : 3152)
안마피리

조재훈(전 한빛맹학교 교장)
  요즘 안마계는 고사 직전이라고 한다. 돈벌이가 잘 되어 의사들까지 욕심을 내고 달려들 때가 어제 같은데 말이다. 이때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각장애인들의 인식개선도 시키고 사회적 지위도 향상시킬 수 있었지 않은가? 국가의 경제와 아울러 다른 장애 분야는 복지나 신직업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에서 자립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꼽히던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 쪽은 오히려 그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일이 어려워질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소견이지만 우리 선배님들이 안마를 처음 시작하던 때를 돌이켜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을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사람의 수명은 유한하고 기억력도 한계가 있다. 인류의 역사를 말할 때도 기록이 시작된 뒤부터를 말하고 있다. 불과 1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안마사들의 역사도 확실치 않은 것이 많다. 1913년 제생원에서 안마교육이 시작된 뒤 일제하의 자세한 기록이 없다. 안마사가 일인들을 위하여 안마피리를 불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말만 남아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모두 사라져갔다. 우리 안마도 고사되어가는 대로 있으면 역시 내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날로 사그라져가는 우리 시각장애인의 생업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서울맹학교 교장이었던 김기창 박사의 ‘한국 시각장애 100년 사’에 우리들 역사에 관한 많은 자료가 들어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안마원은 종로구 낙원동 218번지에 서울안마원이다. 1956년 11월 19일 2평 정도의 낡아빠진 다다미방이 그 시작이었다. 해방 후에는 안마사가 무자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안마피리’를 불며 골목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당시의 참경은 표현하기가 어렵다. 방송국에서 한밤의 고독과 처절한 분위기를 나타낼 때 이 안마피리소리를 효과음으로 택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안마사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나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거리를 무작정 쏘다녀야 하는 과다노동도 없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교통사고의 위험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시각장애인들 가운데 전화기 한 대를 구입하고 대기소를 마련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안마원은 여러 명이 출자해 소위 주식형으로 안마원을 개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차츰 형편이 나아가는 가운데 1962년 5월 12일에는 을지로의 명동성당과 중앙극장으로 통하는 뒷길 곁에 개인이 ‘제일안마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 제일안마원은 나중에 시술소로도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안마계의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명동의 ‘세강안마원’이 먼저니 을지로의 ‘아리랑’이 먼저니 ‘목욕탕 안마원’이 먼저니 하는 이설이 있다. 초대 안마사협회 회장이던 황병화 원장이나 다른 선배의 조언을 들어보았으나 그 증언이 각각이다. 따라서 일단 안마원에 대한 기록도 사회적인 범례를 따르는 바이다.
  맹인이라면 걸인 취급밖에 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며칠씩 골목을 누비며 ‘안마 피리’를 불어야 겨우 한 손님을 맞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몇 년을 모은 돈으로도 전화 한 대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안마원’은 6명이 힘을 모아야 했다. 그렇게 발전하여 협회를 결성하고 안마사 자격에 대한 입법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기반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한·일 국교가 트이니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함께 안마계에도 호황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안마사들도 자력으로 집을 사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군문에 보내는 것은 물론 교육을 시켜 기업가나 학자로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명군이었던 세종대왕께서 맹인에게도 생업을 가지게 해야 그 자녀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을 실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는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 그리고 일부 방송인이나 법관 등 시각장애인의 직업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의 살림 형편은 오히려 나빠지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바우처안마 같은 것으로는 기초생활 외에 큰 기대를 가지기가 어렵다. 요즘 맹학교 졸업생들이 안마사로서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안마수련원 출신까지 합쳐도 인력자원이 부족하다고 한다. 안마계의 문제가 크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면장갑 한 짝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맨손으로 한겨울에 안마피리를 불던 일을 상기해보자. 안마피리에 고드름이 달려도 손가락이 얼어서 제대로 감지할 수 없었던 때의 그 고통! 밤길을 헤매고 헤매도 맹인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길 안내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 처참함! 하는 수 없이 구걸을 해도 더운 밥 한 그릇 얻기 어려웠을 때의 헐벗음과 배고픔! 그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은 양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인의 주장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의 안마계의 어려움을 비관스럽게만 생각하지 말고 안마피리로 무에서 유를 이루어 낸 선배님들의 정신을 본받아 모든 안마사들은 새로운 도전에 앞장서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그런 가운데도 한 가닥 희망을 주는 것은 치료안마의 안마방이나 부위별 안마인 두견안마로 일부 안마사가 성업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역시 도전하며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산후조리원과 피부마사지는 물론 역시 안마의 업무 분야인 침과 뜸 그리고 전기치료 영역도 개척의 길이 다양하게 열려있지 않은가? 고통과 눈물의 유물이며 극복의 상징이라 할 안마피리는 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음으로라도 안마피리를 만나보며 결의를 다져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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