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가 심어준 목표대로 한의학 박사가 된 시각장애인
지난 12월 6일 한국시각장애인아카데미가 개최한 박사학위 논문발표회. 시각장애인 한대연(남, 63세) 박사는 논문을 발표하다가 갑자기 김춘수의 시 ‘꽃’을 읊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를 모두 읊은 후 그는 자신이 늦은 나이임에도 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을 맹학교 은사 이길재 선생의 공으로 돌렸다. 시의 표현처럼 이름을 불러줬을 때 꽃이 되었듯이, 그는 이길재 선생이 ‘너는 언제 박사될 거야?’라며 계속해서 최면을 걸었기 때문에 박사가 된 것 같다며 감사해했다.
한대연 박사는 국내 시각장애인 최초의 한의학 박사다. 물론 국내가 아니라 미국 사우스베일로대학교(South Baylo University)에서 2012년에 취득했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요추간판탈출증으로 인한 요각통에 대한 한·양방적 문헌고찰’로, 양방과 한방논문 및 관련 서적들을 고찰하여 요각통 치료 시 최우선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각종 침술요법의 효과와 그 효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밝혀냈다.
그는 논문에서 요각통의 비수술적 치료 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침술요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침치료 시 치료 기간보다는 치료 빈도와 치료 횟수, 시침혈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짧은 15~20분보다 20~30분의 유침이 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유침 중 염전, 제삽, 동기법, 도마법 등의 운침 시가 단순 유침 시보다 호전율이 높았다고 서술했다.
한 박사는 작년 2월 시각장애인 아내 임영희(여, 57세) 씨와 함께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1년 동안은 자연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쉬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보금자리를 잡은 곳이 경남 밀양이다. 밀양은 고향도 아니고 아무 연고도 없다. 단지 산 좋고 물 좋고 인심이 좋다는 이유에서 선택한 곳이다. 부부는 일주일에 두 번 시각장애인연합회 밀양지회에 침술 봉사 가는 일 외에 시골 같은 마을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16년 전인 1999년 봄, 부부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마흔일곱의 늦은 나이였지만,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일념으로 과감하게 이 땅을 떠난 것이다.
그는 맹학교 졸업 후 20년 넘게 안마와 침으로 먹고 살아왔다. 그러나 오랜 경력에도 고치는 몇 가지 질병 외에는 발전이 없었다. 안 낫는 환자에 대한 부담이 생겼고, 내면에 괴로움은 쌓여갔다. 막힌 환자가 있을 때 마다 치료 잘하는 친구에게 물어도 봤지만, 가르쳐 준 방법대로 해도 낫질 않았다. ‘왜 친구들은 잘 낫는다고 가르쳐줬는데 난 왜 고치질 못하는 걸까’하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진단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진단이 틀리면 병이 같아보여도 그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진단 실력을 키우고자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수 천 년을 내려온 한의학의 본류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에서다. 그 무렵 아들이 미국 유학 중에 있었다. 장애인의 자식이라고 놀리는 한국사회의 왕따 문화 때문에 조기 유학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들 뒷바라지 때문에 아내가 1년에 한 번씩 미국을 오가다가 미국의 한의대는 시각장애인을 받아주고, 면허시험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내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안마사 신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미국에서는 한의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과천에 있는 집을 바로 정리하고 부부는 유학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국로얄한의대에 입학한 그는 3년 만에 캘리포니아 침구위원회(Acupuncture Board)에서 관할하는 시험을 통과해 침구사(Licensed acupuncturist) 면허를 취득했다. 미국에서는 한의사라는 명칭대신 침구사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애초에 박사학위를 목표로 들어왔기에 그의 학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6년 사우스베일로한의대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결국 2012년 박사학위를 얻게 된다.
그가 학위 논문의 주제로 요추간판탈출증으로 삼은 것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 한의사들이 경험하는 환자들 중에 가장 많은 통증질환이 요통이다. 연구가 끝난 다음에 자신의 치료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것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각장애인들도 치료를 하고 있지만, 무자격 카이로프락터들이 디스크를 자기들이 다 고치는 것처럼 해가지고 우리가 기가 많이 죽었어요. 척추교정을 안하면 디스크를 못 고치는 걸로 알고 정신적으로 위축됐었거든요. 그런데 논문을 쓰다 보니 모두 허풍이었더군요. 비수술요법으로 한의사들이 신뢰하고 즐겨 쓰는 것이 침이고, 약이나 찜질, 카이로프락틱으로 고쳤다는 논문은 없더라구요. 침이 가장 우수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10년 이상의 고된 유학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집을 판 돈은 3년 만에 바닥이 났지만, 다행이도 그 해에 면허를 취득해 환자를 받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과 독실한 신앙도 고단한 이국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사실 한 박사는 한국에 돌아올 마음이 없었다. 미국에 있으면 신분이 한의사에 박사지만, 한국에 가면 도로 안마사이기 때문이다. 동양 사람이 동양 의학을 하는 것에 신뢰감을 갖는 미국사회의 정서와 눈이 안보여도 죽자 믿고 오는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 주질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오랜 타향살이로 향수병에 걸려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결국 자신 때문에 고생만 한 아내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버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한국의 맹교육 현장은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침술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이료 공부를 반대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변화된 현실이 그는 안타까웠다.
“역사가 아무리 흘러가도 믿음과 존경을 받은 직업 중에 하나가 의료인이예요. 병을 잘 고치면 생활도 보장받고 존경도 받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의료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침을 꿈꾸는 2~30대의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안마에다 침을 추가하면 분명히 한의사보다 잘 고칠 수 있거든요.”
그는 한의대에서 배워보니 침술교육은 맹학교의 이료과정을 절대 넘지 못한다고 한다. 침술 실력과 이론만큼은 한의사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단 쪽은 한의대가 훨씬 많은 시간을 가르친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지 열 달이나 지났다. 하지만 한 박사는 아직 무엇을 하겠다는 어떠한 계획도 세워놓질 않았다. 그저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 봉사하며 아내와 함께 한가롭게 지내는 요즘이 아주 즐겁고 행복하단다.
“강하진 않지만 한의학을 접하고 공부한 저의 마음 한편에는 이료계에 부채 의식이 자리하고 있어요. 저의 미천한 지식이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가르쳐줄 생각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침술에 보다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5. 1. 1 제92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