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작가로 등단한 시각장애인
지난 11월 10일, 70대 시각장애인 노인이 수필작가로 등단한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조원웅(71세, 1급) 씨로, 계간지 《에세이문예》 겨울호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인물의 행동과 특성을 묘사의 방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소 소설적인 구성을 띈다. (이러한) 형식적 파괴가 탄력성을 주어 재미를 배가했다”고 심사평을 남기며, 그의 작품 <짱 기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짱 기사>는 안마원을 운영하는 팽 원장의 운전기사인 장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필로, 다른 이의 계란을 모조리 건져 팽 원장의 냉면 그릇에 넣고, 팽 원장 일행의 낚시 바늘에 죽은 붕어를 차례로 묶는 등의 네 가지 일화를 통해 읽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조원웅 씨는 “저는 지금 환희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고목에서 연두색 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필이라는 장르의 새싹이었습니다. 저의 가능성을 찾아내 주신 하길남 교수님과 수필창작반 학우 여러분께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라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시각장애에다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안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등단하게 되었음에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쓴 글이기에 어떤 이야기를 쓰든 (앞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겸손을 표했다.
“처음부터 수필작가가 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글 쓰는 기술을 배우고 싶고 취미로 삼고 싶다는 생각에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네 시간씩 정성을 들여 글을 써내려갔다. 이런 그를 눈여겨보던 하길남 교수가 등단을 목표로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목표가 생기자 더 열심히 글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됐고, 그 결과 등단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딸 수 있었다.
“수필창작반에서 공부한 것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력을 잃기 전에는 건축설계사, 즉 이공계쪽이었고, 시력을 잃은 이후에도 안마만 해왔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죠.”
젊은 시절 그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건축설계사’였다. 대학 졸업 후 대한주택공사에 입사해 12년간 아파트 설계 시공을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임시행정수도 이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의 급서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보다 원대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품게 됐다. 이후 그는 대한주택공사를 나와 현대건설, 삼환기업, 두산건설 등 쟁쟁한 대기업을 거쳐 능력을 발휘해 왔다.
거칠 것 없던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1984년 가을이었다. 심야작업을 마치고 집을 향해 차를 몰고 가던 중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의 고비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실의에 빠진 조 씨를 비롯하여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 그리고 두 자녀를 두고 아내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실의 한 선교회를 찾아 재활훈련을 받았다. “안마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생명줄이다”라는 조언을 받고 안마수련원에도 입학했다. 그렇게 그는 안마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한편 그는 다양한 일들에 도전했다. 1986년에는 정보에 목말라 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시각장애인 환경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열고 ‘케인스 다이알’이라는 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그가 신문 기사를 발췌 녹음한 것을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를 걸어 내용을 청취하는 서비스로, 이후 성음회 사서함의 모태가 되었다.
이밖에도 ‘약손안마 봉사대’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주 한 번씩 노인들에게 무료로 안마를 하고, 시각장애인들로만 구성된 ‘광명라이온스 클럽’을 조직해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그는 장애인 복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2008년에는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 석사에 도전했다. 낮에는 안마, 밤에는 공부를 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끄틑 2011년 69세의 나이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렇듯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주저없이 도전하고 정면돌파 해왔던 그의 새로운 목표는 ‘자기계발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3년 안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수필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장애인이 되었어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도전해서 정면돌파하고 살아야 합니다. 용기와 노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인물의 행동과 특성을 묘사의 방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소 소설적인 구성을 띈다. (이러한) 형식적 파괴가 탄력성을 주어 재미를 배가했다”고 심사평을 남기며, 그의 작품 <짱 기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짱 기사>는 안마원을 운영하는 팽 원장의 운전기사인 장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필로, 다른 이의 계란을 모조리 건져 팽 원장의 냉면 그릇에 넣고, 팽 원장 일행의 낚시 바늘에 죽은 붕어를 차례로 묶는 등의 네 가지 일화를 통해 읽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조원웅 씨는 “저는 지금 환희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고목에서 연두색 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필이라는 장르의 새싹이었습니다. 저의 가능성을 찾아내 주신 하길남 교수님과 수필창작반 학우 여러분께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라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시각장애에다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안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등단하게 되었음에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쓴 글이기에 어떤 이야기를 쓰든 (앞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라며 겸손을 표했다.
“처음부터 수필작가가 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글 쓰는 기술을 배우고 싶고 취미로 삼고 싶다는 생각에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네 시간씩 정성을 들여 글을 써내려갔다. 이런 그를 눈여겨보던 하길남 교수가 등단을 목표로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목표가 생기자 더 열심히 글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됐고, 그 결과 등단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딸 수 있었다.
“수필창작반에서 공부한 것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력을 잃기 전에는 건축설계사, 즉 이공계쪽이었고, 시력을 잃은 이후에도 안마만 해왔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죠.”
젊은 시절 그는 그야말로 ‘잘 나가는 건축설계사’였다. 대학 졸업 후 대한주택공사에 입사해 12년간 아파트 설계 시공을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임시행정수도 이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의 급서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보다 원대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품게 됐다. 이후 그는 대한주택공사를 나와 현대건설, 삼환기업, 두산건설 등 쟁쟁한 대기업을 거쳐 능력을 발휘해 왔다.
거칠 것 없던 그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1984년 가을이었다. 심야작업을 마치고 집을 향해 차를 몰고 가던 중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의 고비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실의에 빠진 조 씨를 비롯하여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 그리고 두 자녀를 두고 아내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실의 한 선교회를 찾아 재활훈련을 받았다. “안마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생명줄이다”라는 조언을 받고 안마수련원에도 입학했다. 그렇게 그는 안마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한편 그는 다양한 일들에 도전했다. 1986년에는 정보에 목말라 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시각장애인 환경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열고 ‘케인스 다이알’이라는 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그가 신문 기사를 발췌 녹음한 것을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를 걸어 내용을 청취하는 서비스로, 이후 성음회 사서함의 모태가 되었다.
이밖에도 ‘약손안마 봉사대’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주 한 번씩 노인들에게 무료로 안마를 하고, 시각장애인들로만 구성된 ‘광명라이온스 클럽’을 조직해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그는 장애인 복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2008년에는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 석사에 도전했다. 낮에는 안마, 밤에는 공부를 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끄틑 2011년 69세의 나이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렇듯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주저없이 도전하고 정면돌파 해왔던 그의 새로운 목표는 ‘자기계발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3년 안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수필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
“장애인이 되었어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도전해서 정면돌파하고 살아야 합니다. 용기와 노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2014.12.15 제91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