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데이비드 블렁킷을 꿈꾸는 시각장애인
지난 10월 1일, 서울맹학교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원순 시장의 축하 메시지 영상에 이어 영국의 시각장애인 하원의원 ‘데이비드 블렁킷’의 축하 메시지 영상이 상영됐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 중 데이비드 의원의 영상에 유독 가슴 뭉클한 감정을 드러낸 시각장애인이 있었다. 그는 56세의 나이로 서울맹학교 이료재활과에서 재활과정을 밟고 있는 늦깎이 재학생 문성호(1급) 씨다.
문성호 씨는 데이비드 의원에게 서울맹학교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2006년 안마사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외국의 기사들을 첨부하면서 축하 메시지를 부탁하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데이비드 의원이 화답하여 영상을 찍어 보낸 것이다.
‘데이비드 블렁킷’ 의원은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지만 교육고용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27년째 하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때 블레어 총리의 오른팔이자 2008년에는 차기 총리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의원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각장애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며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이료대학 설립 문제나 미국의 프린팅하우스처럼 점자점역인쇄를 총괄할 수 있는 정부기관 설립 문제, 접근성 문제 등 시각장애계가 당면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이미 정치에 발을 들인 적이 있다. 선천성 소안구증을 갖고 태어나 약시인데다가 학부시절 백내장까지 앓게 돼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 끝에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당시 내무위원회 소속이었던 정균환 전 의원의 정책보좌관으로서 6년 동안 일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2000년에는 한국경찰연구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영국으로 건너가 포스트 닥터(박사 후 연수과정)도 수료해 경찰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런데 2002년에 대형 사고를 당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 후유증으로 2년 후 망막박리가 되면서 왼쪽 눈이 실명하게 된 것이다. 오른쪽 눈의 시력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막상 한쪽 눈을 실명하고 나니 활동반경이 위축돼 몇 년간 외부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위기를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되면서였다.
그는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더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다. 미미하지만 남아 있는 시력을 최대한 활용해 지금까지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쌓아온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경찰정치학》, 《옴부즈맨과 인권》, 《미국, 아직도 노예제 국가?》 등 많은 책을 펴낼 수 있었다. 또 경찰노조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자치경찰연구소 소장을 맡아 운영하면서 경찰의 민주화, 더 나아가 국민 인권 보호를 위해 연구 활동과 외부 활동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3년 전 의사에게 “1급인데다가 진행성이고 언제 나머지 눈도 실명할지 모르니 대비할 겸 재활교육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받았다. 그길로 그는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가 기초재활과정을 이수했고, 현재 서울맹학교 이료재활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서울맹학교 용산캠퍼스에서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시각장애계에도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맺어온 인적 네트워크와 쌓아온 역량들을 활용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헬렌 켈러에게는 설리반이, 강영우 박사에게 석은옥 여사가 있었던 것처럼 시각장애인의 복지향상을 위해서는 시각장애인 스스로의 노력과 투쟁뿐만 아니라 정안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과 필요로 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정안인들이 알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첫발걸음으로써,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각 분야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이외에도 데이비드 블렁킷 의원과 인연이 닿은 것을 계기로 내한 강연과 영국에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안마의 탁월함을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 등을 부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성호 씨가 시각장애계에서 자리를 잡고 ‘새내기 정치인’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을지 무척이나 기대되는 바이다.
(2013.12.01 제894호)


